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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강, 풍성한 사랑.


(315), (449), 묵도, 사도신경, 기도, 설교, (452), (458). 54.


"(빌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전 시간에도 지극히 선한 것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그 이해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 '선'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베푸신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입니다. 이 '선'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너무나 탁월해서 그것을 위한 희생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풍성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 '풍성'(perisseuvw)은 하나님의 사랑이 양과 질에서 차고 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탁월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풍성한 사랑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율법)을 출애굽 이후에 주신 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구원했다. 그러니까 내 계명을 지켜라."로 돼있습니다. 출애굽 전.후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만약 출애굽 전에 준 것이면 율법을 지키면 출애굽을 시킬 것이고, 못 지키면 안 시키겠다는 조건이 됩니다. 만약 율법을 지키는 것이 출애굽의 전제조건이었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영원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인간은 모두 영원히 천국이 있는지도,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좀 속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개판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직행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줬으니까, 탁월한 백성이 됐으니까 법을 지켜 탁월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켜야할 어떤 책임이나 전제조건을 주어서 거기에 합격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고 구원을 해주고가 아닙니다. 죽을 땅에서 건져줬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땅에 들어갔으니까 그 땅의 주인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후에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한 모습이었을 때에, 똥 수세미 같이 더러웠을 때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릴 사랑하셔서 우리의 복과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느 부자처럼 '내가 부자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먹고 마시자. 이제부터는 뭐든 내 마음대로다. 부어라, 마셔라, 자유다, 해방이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까,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까, 온갖 좋은 것들로 채워 주셨으니까, 그 땅에 사는 백성으로 죽기까지 순종하고 믿음을 지켜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왜냐하면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냐 아니냐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나안이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거기는 온 땅이 꿀과 젖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거하는 은혜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한 곳이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인 것입니다. 

내 실력이나 내 공로가 있어서 들어간 땅이 아닙니다, 불순종하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면 그곳은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누가 막아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빛이 밝혀지면 어둠이 왜 물러갑니까? 몽둥이로 패서 내쫓기 때문입니까? 함께 있을 수가 없으니까 스스로가 사라진 겁니다. 죄(불순종)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덧입혀 자녀로 삼으신 후에 우리에게 빛 된 삶과 순종을 요구하고,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 겁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니까 우리가 그 복된 나라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셔서 믿어라, 순종해라, 율법을 지켜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풍성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풍성하신 사랑을 모르면 우리는 세상에서 사랑을 누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고야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성한 사랑을 살찌우는 것이 '지식과 총명'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의 지식이고 이 지식을 삶으로 옮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너를 죽여 나를 살리는 세상인데 오히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는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또 그 지식을 실행할 지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전해 오는 너무나 강한 사탄의 세력 앞에 응전할 능력도 용기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락하신 것이 성령입니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고 그 지식을 우리의 삶으로 옮길 지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지식과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지혜의 양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아는 하나님만큼만 사랑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을 행할 지혜를 구하고 행하기를 힘써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사랑의 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강도가 곧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는 잣대의 눈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 못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입은 자답게 관용과 섬김이 있는 사랑과 용서를 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말로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 삶은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의 사랑 말고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허물과 죄를 가리움 받은 우리들입니다. 

우리 또한 남의 허물을 감싸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함께 은혜를 나누면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면서 함께 도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묶어 주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하나님이 묶어 놓으신 우리 교회임으로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끝내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식 일에 간섭합니까? 남의 자식 일에 간섭합니까? 자기 자식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잘되라고 콩 나라, 팥 나라 간섭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남의 자식 그렇게 간섭했다가는 뺨에 철판을 깔고 다녀도 못 견딥니다. 남의 자식은 내 간섭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자식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 순종하는 것, 형제 우애를 키우는 법 등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니까 귀찮도록 간섭하시는 겁니다. 때로는 매까지도 드시면서... 여러분, 징계가 무엇입니까? 때려서 내쫓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간섭을 잘 깨우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분별력입니다. 사탄이 자꾸 불순물을 섞어 놓기 때문에 잘 가려서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별력을 잘 사용하는데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역사는 기적으로 둘러싸인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는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나치독일 등 수많은 강대국으로부터 형언치 못할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그 나라들은 하나 같이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이스라엘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살려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련의 터널을 끝없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랍 동맹국들로 둘러 싸여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까지 전쟁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뭐라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사랑이라고 여겨집니까? 요즘 같은 불경기와 경제 위기 속에서 사는 복권마다 당첨이 되어 이웃에게 인심을 팍팍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하다못해 십일조를 냈으면 당장에 그 자리에서 몇 십 배로 뻥튀기기 정도는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해를 가르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그런데 써먹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입니다. 그는 장자로서 부모의 재산을 모두 다 물려받았고 인간적으로도 야곱에 비해 모든 면에서 출중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일생은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하십니다. 도대체 야곱과 에서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간섭 속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편했습니까? 오히려 그의 삶은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그가 당한 수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갔고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방패로 삼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얻으면 다 얻는 것입니다. 시련을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미련해서 잠시라도 버려두면 죄의 불구덩이로 달려갑니다. 그 미련을 버리라고 주시는 시련인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돌이켜 생명과 진리와 영원이신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고 우리 앞의 시련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간섭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욕심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갖기까지 우리에 대한 그의 훈련을 쉬지 아니하십니다. 그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내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불만이고 갈등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련이라는 막대기를 통해 우리의 인생관을 바꾸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의 거룩을 위한 훈련입니다. 세상 것 버리고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라는 겁니다. 예레미야 9:23-24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뭘 자랑하랍니까? 지혜, 용맹, 잘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일에 분별력이 필요한 겁니다. 이것을 놓치면 다 놓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 권세, 영화, 세상의 지혜를 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다 있는 겁니다. 우둔한 인간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늘 자기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만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지체로 묶어 놓으신 것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훈련받으라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흐름이 우리를 통하여 다른 지체로 그리고 또 다른 지체로 계속되도록 이어나가라는 것입니다. 지고 당하고 망하는 것 같을지라도 섬기면서 우리에게 흘러온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세상으로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 해결 방법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나를 통해 일상 속에 사랑과 나눔이란 선을 통해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풍성한 사랑이 결코 내게서 멈추어 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절정이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는 게 복입니다. 내 생각과 내 결론대로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왕 노릇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러 이러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하라는 것 다 할께요." 이러는 겁니다. 결국 뭡니까? 내 맘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선도 없고 진실도 분별력도 없습니다. 아담의 복사판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권위 아래 들어가는 것을 속박으로 여깁니다. 참으로 무서운 자존심이고 착각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참 자유를 누리는 길이요, 진실된 것이요, 가장 큰 은혜요, 지혜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무지한 것이고 모든 것을 잃고 망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이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요, 사망이요, 멸망입니다.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내 판단에 아무리 억울하고 밑지고 망할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이면 주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그게 선이고 믿음입니다. 이 순종이 없으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매를 버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내 맘 대로를 주장할 사람이 있습니까? 내 맘대로는 매를 버는 것이고, 믿음을 버리겠다는 것이요, 그것은 무지고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율법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게 거룩이든, 지혜든 무엇이든 모두가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의도, 거룩도, 영생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고 관습, 명성, 칭찬, 승진, 부귀 등등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지식도 지혜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초를 쌓고 자기 인생의 기둥을 다듬어 세웁니다. 그들의 살길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재림의 날에 그들을 영원히 멸망하도록 조처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도 지혜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엡4:17-1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나님 없이는 박사학위 열이라도 무식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지식이나 지혜는 속빈 강정입니다. 믿음 안에서만 성도의 생명이 있고, 지식, 지혜, 의 모든 부요함이 있습니다. 이 진실을 버리면 목사라도 불신자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빛 가운데로 나아올 수가 없는 삯꾼들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대해 무식할 뿐만이 아니라 들려줘도 깨닫지도 못하고 오히려 도망쳐서는 바벨탑을 쌓습니다. 아담이 그 싱증적 인물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자유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죽음의 무도회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유도, 진실도 지식도 지혜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지극히 선한 것'이 있고 온갖 희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하신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고 기도와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아는 자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빛으로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언행심사 모두는 하나님의 모습과 뜻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체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그렇게 보내진 자들입니다.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세상은 우리가 성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쳐다볼 것입니다. 우리의 언행심사가 그대로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춰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비추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풍성한 사랑을 따라서 아프고 굶주리고 병든 심령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 부지런히 날라야 합니다. 특별히 연약한 자에게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고 의지할 기둥이 돼주어야 합니다. 억울하지만 분풀이 대상도 돼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그 사랑과 섬김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지배당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 그것이 악하고 미련한 아내가 됐건,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나 이웃이 됐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서 대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 참아 줄 수 없는 억울함을 안긴 자, 부당한 대우를 하는 자 그래서 손상된 명예나 권리를 되찾고 앙갚음이라도 하고 싶을 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풍성한 사랑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문제들 속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억울해도, 분을 품지 말고, 상처를 입힐 말도, 비판하고 싶은 마음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이 온전히 자신을 지배하게 하셔서 그 악당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기까지 자라 가야합니다. 된장이 숙성됨으로 그 맛의 깊이를 더해가듯이 우리의 사랑도 내 몸에서 삭혀져 우러남으로 가장 먼저 내 가족 내 자녀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저는 아들의 선교비를 충당하느라고 손주들 생일에 양말하나 선물하지 못했는데 지난 제 생일에 손자손녀들이 보내 온 세 통의 엽서에서 '좋으신 할아버지, 최고의 할아버지, 위대하신 할아버지'라는 글귀를 보면서 섬뜩한 느낌과 함께 정말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할아비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따라서 우리의 빛 된 삶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주변부터 비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이고 풍성한 사랑을 가진 자의 온전한 삶의 방식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바보스러운 아이에게라도 '너 못났다. 너 바보다' 그러지 말고 오로지 사랑으로만 돌보고 품어주고 끝까지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수준의 '완전'이 아닙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완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입었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에서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기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기에, 순종의 삶을 살았기에 그는 온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능력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만큼 일하라고 할당량을 정해놓고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분도 아닙니다. 요일 5:3을 보면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 아니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도대로 순종하여 따르면 우리 앞의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건 순종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우리의 순종입니다. 자신의 힘과 행위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인류에게 선한 의도를 펼치신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공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를 안다면 우리는 어떤 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확신하여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합니다. 

못난 놈 못난 대로 잘난 놈 잘난 대로 대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둔 이 땅의 빛들로 서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현실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은 때에도, 깊고 깊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인생의 시련이 아무리 캄캄할지라도 우리가 비추는 그 풍성한 사랑을 가릴 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를 믿으시고 아무리 억울하고 슬플 때에도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비추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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