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따라 순종합시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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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


막 3:20-35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정치 경제 종교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한 나라를 꼽으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서슴지 않고 대한민국을 제일 먼저 언급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대한민국은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관까지 변했습니다. 앞으로도 때로는 사람이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해갈 것입니다.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하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는 사회를 붙잡아 줄 힘이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서 가족이라는 개념과 가족의 울타리도 엄청나게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지켜왔던 전통적인 대가족이 깨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한 마당에서 8촌이 뛰어논다는 말은 구석기 시대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대가족제도는 해체되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를 이루는 소위 핵가족제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천대로 접어들면서 핵가족도 해체되고 싱글 가족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령화, 이혼, 미혼가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사는 가구가 4가구 중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빠른 속도로 혼자 사는 가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던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이 뿌리째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가족 관계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왔던 공동체 성마저 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변하지 말아야 공동체성이 깨어져 이 사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던 관계가 깨어지니 인간은 결국 혼자만 남습니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변화된 가족 관계와 깨어진 공동체성 속에서 교회는 이 사회를 향해 어떤 해답을 제시하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성경은 가족 관계 해체라는 문제에 대해 어떤 답변을 주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대답해 왔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로는 가족을 잃어버린 세대, 홀로 사는 사람들에게 답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월의 가정의 달이 오면 대개 목회자들은 5월 첫째 주에는 어린아이에 대한 설교나 교육에 대한 설교, 둘째 주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설교를 하고, 그리고 셋째 주에는 가정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주로 동원되는 성경의 근거는 가족의 성스러운 원형이라는 성경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속에서 이상적인 아버지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이 사랑에 응답하는 이상적인 자녀의 모습을 말합니다. 가족의 구성원들끼리 화목하게 사는 원리로 순종과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적인 측면을 보면 수직적 위계질서 중심의 전통적인 가족 윤리를 말합니다.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유교적 윤리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싱글 세대가 많아지고 추세이기 때문에 5월 설교의 주제를 다시 한번 설정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접근으로서는 변화하고 있는 가족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90년대에 가정 사역이라는 목회 용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결혼예비자학교 같은 프로그램이 목회의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교회는 흔들리고 있는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지으신 기관은 두 가지가 있는데, 제일 첫 번째가 가정이고, 두 번째가 교회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같은 교회, 교회와 같은 가정을 이상적인 모델로 여겨왔습니다. 가족의 해체와 가정의 붕괴 앞에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교회의 가족화입니다. 건강한 가정을 통해 사회를 회복시키려는 기독교적 처방이었습니다.
 
문제는 가정 사역에서 말하는 가족관계는 혈연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수준이지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넓은 의미의 가족에 대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가족은 혈연관계에만 매이는 좁은 의미의 가족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넘어섬으로써 펼쳐 보인 새로운 가족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족에 대한 도전적인 입장은 아예 펼쳐 보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가족주의 가치관을 넘어가지 않는 분으로 이해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가족'에 대한 뜨거운 염원이 너무 뜨겁다 보니 우리 주변의 적지 않은 독신자들, 그리고 깨어진 가정, 배우자를 잃은 외형상 가족의 테두리가 일그러진 경우에 대한 속 깊은 배려가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족이 한 집안의 구성원이라면 가정은 그들의 공동체적 삶이 머무는 울타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대개 그 가정의 울타리가 혈통을 강조하는 가부장주의의 전통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타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가족주의의 문화가 뿌리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혈통상의 계승과 유대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가족 문화와 결합하여 기독교 안에서조차 그런 인식의 한계를 냉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합니까. 가족을 어떻게 이해해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성경은, 특히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가족을 이해하셨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주목해보십시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군중들에 둘러싸여 한참 사역에 열중하시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제자들 중에 한 명이 "선생님, 모친과 동생들, 누이들이 당신을 찾습니다."라고 쪽지를 올려드렸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으로 냉담했습니다. 둘러서 있는 제자들과 군중들을 보면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오히려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말하고 있는 가족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본문의 주변 맥락을 살펴보면,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가 좀 수상합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정면에서 도전하다가 여러 번 창피를 당하고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미쳤다. 예수가 바알세불에 붙잡혀 귀신을 쫓아낸다는 악성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군중은 루머에 약합니다. 설마 하면서 루머를 반신반의합니다. 카더라는 방송국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중들의 귀를 모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역시 항간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나섰고, 그를 붙잡아둠으로써 아마도 가문의 망신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즈음 예수님께서는 바알세불 논쟁으로 서기관들과 치열한 공박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바알세불 귀신에 들려 미친놈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서기관들의 불순한 비난에 예수님은 귀신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로 율법학자들을 또한번 질식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뜻밖에도 혈연인 자신의 형제들에 대해서 냉정한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심지어 어머니에게까지도 말입니다. 세상의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가족에 대한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을 박대하는 듯한 예수님의 언사가 예수가 귀신들려 미쳤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이었을까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라기보다, 예수님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족관과 사람들이 이해하는 가족관이 달라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혈연중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가족관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예수님의 가족관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족이란 새로운 지평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신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 가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사로운 혈통적 연고에 붙들리지 말고, 대의와 명분을 향해 시야를 넓히고 의식을 깨치며 마음을 열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가족 관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도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들왔던 것은 성경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유교적 가치관을 담고 있는 위계질서 중심의 가족관이었습니다. 또 해체되는 가정을 보면서 시작된 가정 사역에서도 교회의 가족화 이상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혈통관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혈통 중심의 가족 관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혈통에 매인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가치공동체, 생활공동체를 말합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교회인 이스라엘을 민족공동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구약의 말씀을 보면 민족 개념이 아니라 중다한 잡족이 출애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야곱의 후손만이 출애굽을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개념이 잡족입니다. "히브리"의 언어적 기원은 "하비루", "아피루"라는 사회적 계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비루들은 애굽에서 살던 "사회적 기반도 없이 소외되어 살던 시민권 없는 계층"을 말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건너다는 말에서 "에베르"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로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왔다는 말입니다.
 
사회적 계층인 하비루를 말하던, 강을 건너 온 사람들을 말하던 히브리 원 조상들은 모두 떠도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했던 사람들은 근거지를 잃고 떠나온 사람들, 계층적 억압과 불이익을 체험했던 잡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들을 "중다한 잡족"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 수수 혈통주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공동체로 뭉쳤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다한 잡족"들을 하나로 엮어 주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낯선 땅에서 종 되었던 공동의 경험과 약자들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공동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해 준 것은 고난 받은 공동 경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를 민족 개념, 혈통 개념으로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오해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당신의 백성을 부르실 때에 혈통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제한시킬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 세계에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통해 신약교회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또한 신약교회도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주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백성을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민족이나 혈통, 가족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신약의 교회도 혈통이나 민족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혈통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혈통을 뛰어넘는 것이다. 교회는 가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교회는 민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를 보면 지나치게 가족 중심적이고, 우리끼리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는 전제 조건으로 가족과 재산의 전적인 포기를 요청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의 파송 설교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가족을 포기하고 심지어 가족끼리 원수가 되어 고발하며 법정에 끌려가는 매정한 분열과 갈등을 감내해야 하리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경우를 종합해볼 때,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을 뛰어넘는 월가정신, 가족을 뛰어넘는 정신을 통해 혈통상의 가족을 넘어 "하나님의 가족"을 재구성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를 부정하라는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고르반'의 관행을 예로 들어 부모에 대한 의무의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른들의 소유물로 생각하던 어린아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보다 훨씬 부모 사랑을, 어린 아이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족관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족관계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의무를 다하되, 가족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 세상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듭난 가족", "가족의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사회화, 사회의 가족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가족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합니다. 가정과 같은 사회에서 가족과 같은 이웃들 함께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집단을 꼽으라 한다면 가족일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족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뭉친 새로운 공동체요, 혈연이 아닌 공의로 뭉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라고 일깨우시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참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뭉쳐진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는, 뜻으로만 뭉쳐진 메마른 이념공동체가 아닙니다. 더욱이 비밀결사나 지하조직처럼 점조직도 아닙니다. 그 공동체는 밥상을 함께 나누는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요, 계층과 신분과 상관없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나눈 사랑의 식사가 이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가족은 밖으로는 공의를 펼치며, 안으로는 사랑으로 뭉쳐 있는 공동체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며, 오늘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원형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단순히 영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대안공동체였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 사회는,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은 어떤 면에서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 있습니다. 사회는 이타적 사랑을 베풀 여유를 허용할 틈이 없이 효율과 경쟁의 원리에 우리의 모든 삶을 내던지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습니까? 사회의 공동체성과 가치관이 무너질 때에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을 울면서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정부에서는 사회개조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국민들 스스로가 그것으로 이 민족의 병폐를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가족 관계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공허한 이상이 아닙니다. 시급히 이루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요구입니다. 이웃을 모르고, 친구를 모르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하고, 교회는 그 대안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안으로 사랑과 밖으로는 공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허하게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족을 뛰어넘는 월가정신이 나 자신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우리의 가족은 당당하게 하나님의 가족이라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가족은 서로 소통하며 대화하는 따스한 둥지로서의 열린 공동체인가? 우리 가정의 울타리는 내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끌어안을 만큼 넉넉한 품인가?
 
조금 구체적이고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집은 일 년에 한 두 번이라도 가정의 울타리 밖의 초대하여 집안에 들이고 식탁교제를 나누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우리끼리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이 땅에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과 나그네와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친구 되기를 즐거워하는가?
 
교우 여러분! 이런 저런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가치가 반성과 결단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배타적 혈통주의와 폐쇄적 가족주의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철옹성입니다. 이로부터 파생된 연고주의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로 거기에 칼을 던지셨고 불을 던지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혈통 중심의 가족이 모체가 되어 형성된 각종 연고주의가 권력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만들고,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더욱 쓸쓸하고 서럽게 만드는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찌 하나님의 가족이 이 잘못된 가치관에 동의하고 협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시대적 부름 앞에 우리 갈릴리 가족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안으로 사랑을, 밖으로 공의를 행하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 가정의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한 달에 한번, 일 년에 몇 번이라도 친구와 이웃, 특히 지극히 작은 자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여 식탁교제를 나누어보십시오. 함께 음식도 만들고 나눠 먹으면서 서로를 향해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언니, 동생으로 불러봅시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를 따스하게 품어보십시다. 저도 준비되어 있지 못하고 부족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여러분들을 제 아버지로 어머니로, 누님으로, 형님으로, 동생으로 불러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우리는 혈통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사랑과 공의가 메마른 이 시대 속에 안으로 사랑을, 밖으로 공의를 실천하여 무너진 민족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생동하는 신앙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어머니를 찾습니다(Mothers In Danger of Extintion)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가족
어떤 관찰 결과
마마보이, 리더 될 가능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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