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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큰 믿음(you have great faith)


마태복음 15:21-28 


  한 여인의 마음과 행동을 보시면서 주님은 '큰 믿음이다'라고 평가를 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보면 큰 믿음도 있고 작은 믿음 그리고 죽은 믿음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풍랑 가운데서 두려워하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람과 환경을 보다가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을 합니다. 환경을 보면서 절망하는 믿음은 작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이론과 신조에만 매여 있는 죽어 있는 믿음, 외식적인 믿음을 보게 됩니다. 

"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로 큰 믿음을 가질 때 구원과 기적은 일어나고, 회복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큰 믿음을 가진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권면하십시다. "집사님,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 주일을 보내면서 과연 우리가 가져야 큰 믿음은 무엇이며, 우리가 깨달아야 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Ⅰ. 연대의식을 가진 사랑의 마음이 큰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두로 지방에 들어온 것을 안 한 어머니가 주님께 나아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귀신에 의해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25절도 보세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며 간청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딸의 처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었고, 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건, 외부적인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제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시끄러운 꽹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믿음은 사랑을 내포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도 연대의식과 동일시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성육신하여 주심으로 우리와 동일시하여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체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동정하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이렇게 표현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다닐 때 주님이 나타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였습니다.(행9:4)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신앙인이 고통당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주님도 그 곳에 있었고, 같이 아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연대의식과 동일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주님의 연대의식과 동일시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꽃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요셉입니다. 그런데 왜 메시아가 요셉을 통하여 나오지 않고 유다를 통하여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야곱의 12 아들이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초가 되게 되었을까요? 

 창세기 44장에 보면 베냐민이 종이 될 위기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전 같았으면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을 나두고 자신들만 고향으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 같이 베냐민이 잡혀가는데 갑니다. 연대의식입니다. 이전에 요셉을 파는데 앞장섰던 유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44:30-33) 
  
 야곱도, 유다도 가진 것은 연대의식입니다. 동일시의 마음입니다. 대신하여 희생하려는 유다의 마음이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통로를 통하여 메시아가 오게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마음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고 일개 국가가 형성되는 기적의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 부모님의 연대의식과 동일시 사랑을 또한 깨닫게 됩니다.  

 <역린>(이재규 감독)이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역린(逆鱗)은 용의 턱밑에 거꾸로 난 비늘로, 왕의 노여움을 뜻합니다. 정조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할아버지 영조 왕이 죽자 왕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노론과 영조의 마지막 중전 정순왕후는 모든 부분에 권력을 장악하고서 정조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조정과 군사 심지어 일반 백성들의 삶에도 노론 세력이, 부조리한 구조가 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정조는 어떻게 변화를 일구어 내는 지를 보여 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변화를 일구어내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노론파 신하들이 변화를 추구하려는 왕에게 대적을 합니다. 이러한 세력 앞에서 상책 갑수(정재영 분)에게 중용 23장을 외우도록 합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아 爲能化니라) 

 작은 일에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람도 변화시키고, 사회도 변화시키고 기적을 낳는 길임을 보게 됩니다. 만약 세월호 선장이 최선을 다했다면, 거기 물건을 실을 때 감독했던 직원이 최선을 다했다면, 해경에 있던 사람이 최선을 다했다면, 모든 감독을 맡았던 관직에 있던 사람이 최선을 다했더라면 이런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작은 일이라 무시하지 말아야 함과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어떤 위치나 직위만을 탐하는 욕심도 버려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적으로 본 부분이 있습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 분)는 자신의 아들인 정조를 지키기 위해 정순왕후를 제거하려다가 들키게 됩니다. 결국 이것을 근거로 정순황후는 정조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이든 차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들에게는 건드리지 말라면서 자신이 그 독이든 차를 기꺼이 먹으려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정조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왕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양주동 님은 이렇게 노래를 하였습니다.  

 "나 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셨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위에 주름이 가득 땅위에 그 무엇이 높다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이 주님과 부모님의 동일시의 사랑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교리보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젖어있는 믿음들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향하여,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세계에 일어나는 슬픈 일들을 보면서 그저 판단자로, 제 3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식, 동일시의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변화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Ⅱ. 난관을 돌파하며 끝까지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즉, 수리아 지방 베니게의 한 여인이 딸의 문제를 들고 주님께 담대히 나아왔습니다. 가나안 여자입니다. 팔레스틴 원주민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는 것 때문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베니게 사람들도 유대인들에 대하여 강한 적의를 품고 살아 왔습니다. 민족 감정의 장벽을 뛰어 넘어 주님께 나왔습니다. 23절, 제자들이 시끄럽다고 무시하는 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런데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며 주님께 나왔는데 주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과 거절은 너무나 큰 장벽인 것입니다. 할 뿐 아니라 상처를 주는듯한 발언을 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방인에게 먼저 권능을 베풀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되는 장벽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자극적인 말씀을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여인에게 상처를 주시 위해서입니까?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 소외된 한 여인까지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사실 더 깊은 뜻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단순히 간청하는 차원을 넘어서 주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자가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더 견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거절감정 가운데서도 주님의 성품과 계획을 끝까지 붙잡았습니다. 응답이 아닌 주님의 침묵과 거절 가운데서 변함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일반인이 즐겨 사용하는 정처적인 칭호였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하고 능력 있는 기적을 행하는 자로 보고 부른 칭호였습니다. 자기 기대의 대상자로서 칭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고, 제자들 또한 호의적이지 많은 않았습니다.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화를 내면서 뒤돌아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25절에 "주여"라고 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무시함이 섞인 거절을 합니다. 그럼에도 "주여"라고 합니다. 문제가 있고, 상황이 어려워지고, 거절 속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신앙이 성장하고, 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탁 차원에서 더 깊은 기도로, 겸손한 예배로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참 믿음의 모습이요, 주님의 바라시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과 신앙은 단순한 선 아닙니다. 1차 방정식이 아닙니다.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것이 큰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상처를 돌파하는 것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욥은 그 시대에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르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욥의 삶에 어둠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내렸습니다. 재산을 읽고, 자녀를 읽고, 심지어 자신이 심한 피부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은 채로 나왔으니 벌거벗은 채로 그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오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쉬운 성경, 욥1:21)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8-10) 
  
욥은 믿음은 고난을, 난관을, 상처를 돌파하는 믿음입니다. 연단의 과정을 잘 견딘 정금 같은 믿음, 큰 믿음입니다. 그 결과 모든 것들이 회복되었으며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네명의 친구들이 먼길이지만 이 친구를 메고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아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포기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지붕으로 올리고, 지붕을 뚫고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장애물을 돌파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거기에 기적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세월 호 침몰 사건을 보면서 신달자 시인이 추모시를 썼습니다. 

 "산인들 울지 않겠느냐. 물인들 거세게 파도치지 않겠느냐. 태양은 죄없이 동트는것이 미안해 미적거리며 떠오릅니다. 오...! 어쩌자고 연두빛 신록의 생명들을 물밑으로 잠기게 했는지요. 어린아이의 부모를 잠기게 했는지요. 아프고 갈갈이 가슴 찢어집니다. 그러나 이젠 울지 말아요. 물속에 잠긴 아이들의 소망은 통곡이 아닌지 모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여. 조국의 못난 가슴팍을 맥없이 바라본 국민들이여. 
이젠 일어섭시다. 이젠 두 손에 불끈 힘을 줍시다. 우리 다시 울부짖는 가슴을 붙들고, 서로 쓰다듬고, 서로 상처를 업어줍시다. 우리는 좀 더 가슴을 넓히고, 우리는 좀 더 마음의 키를 키우고, 그래,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상처로 온 몸이 녹아내리는 사람들을 업어줍시다.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 업어주며, 서로 달래어 줍시다. " 
  
 저에게 이 분의 글이 마음에 와 닿는 까닭은 이전에 신문에서 이 분에 굴곡진 인생여정에 대하여 본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 35세에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지만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병 수발은 24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일찍 감치 촉망받는 시인이었지만, 양복 천을 팔기 위해 보따리장수를 하게 됩니다. 조금 정신을 차릴 즈음에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져 꼬박 9년을 앉은뱅이로 살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제는 끝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유방암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반신불구의 남편, 딸 셋과 팔순이 다 된 시어머니의 삶까지 짊어져야 했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받쳐 들고, 숨이 턱턱 막히는 인생의 언덕을 올라야만 했던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기에 '집단 자살'을 생각했고, 남편의 심장을 쏘기 위해 소리 없는 총을 구하고 다녔으며, 시어머니를 너무 미워해 여름밤 벼락이 치면 벼락 맞을까 나가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준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게 된 것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믿음으로 견딘 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게으른 습관을 잘 아셔서 나를 부지런하게 하기 위해 무거운 일거리를 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았고, 열정을 읽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산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랑을 믿었고, 내일을 믿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축복을 받았고, 딸들을 얻었으며 무엇이 가족 사랑인지 알았고, 어머니는 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 영원히 싸우고 사랑할 것은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 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은 일이 더 많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너무 빨리 불행하다고 외쳐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성도 여러분! 혹 오늘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까? 슬픔이 있습니까? 그럴수록 더 주님께 나아가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신 성품을 의지하여 더 우리의 신앙이 굳어지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슬픔과 고난이 우리를 연단하여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차원에서 한 단계 더 성숙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견디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참 은혜와 진정한 기적은 반드시 연단되는 과정을 겪은 자에게 주십니다. 지금의 시련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선포를 하십니다. '잠시만 기다리라! 내가 슬픔 대신 화관을 주 것이다. 재대신 희락을 줄 것이다. 근심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줄 것이다.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아 줄 것이다. 성읍들은 중수될 것이다" (사61:3-4) 
  
주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습3:16-20) 

 기도의 손을 늘어뜨리지 말기 바랍니다. 시험과 연단을 참고 견디면 천한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모든 무게와 모든 시험과 어려움과 거절과 인생의 무거운 걸음을 십자가에서 달게 져주신 우리의 주님, 우리의 부모님의 그 사랑, 그 인내, 그 연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도 자녀들을 위해,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견디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통과하는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자존심을 뛰어넘어 사명과 회복에 관심을 두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26절, 주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도 말씀하십니다.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언약 밖의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을 하였고, 그런 취급을 하였습니다. 냉정하게 느껴지는 시험적인 말에 여인은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의 부스러기 은혜만 있어도 자신의 딸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충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자 이 여인을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보니 실제로 나아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적이 없어도, 갑자기 뜨거운 무엇을 느껴지는 것이 없더라도 주님이 말씀하셨기에 그대로 될 것을 믿고 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그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애쓰고 수고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2년 동안 자궁에서 지속적인 출혈이 있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도 만지면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 주님 안에 있는 '부스러기와 같은 작은 것이라도 나를 회복시킬 수 있다'라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은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어머니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얼마든지 마음이 상하고, 불평할 수도 있고, 항의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자기가 개로 취급받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부스러기라도 주어먹겠다는 겸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취급 받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고치고자 하는 사명, 본질, 회복이 더 중요했습니다. 큰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겸손해지거나 낮아질 수가 없습니다.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겸손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울 수만 있다면, 영혼들을 세울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대접을 받아도 괜찮다는 겸손한 믿음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던 부모님의 마음을 깨닫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잘 될 수 만 있다면, 회복될 수만 있다면 어떤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빠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매일 밤 힘들게 일하고 땀 흘린 채 들어와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참아야지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빠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식들이 좋은 옷에 좋은 음식만 먹이고 당신은 일 년 내내 단벌 신사여도 아빠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빠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매일 밤늦게 술이 취한 채 들어와도, 아무도 안 반겨주고 냄새난다고 역정 부리고, 엄마의 화난 목소리를 들어도 고독한 아빠는 아무 말도 변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아빠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인생과 삶은 없고, 오로지 아내와 자식뿐...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가족의 노예였습니다. 
가족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아빠는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빠가 그리울 땐 아빠가 없었다고...아빠가 필요할 때 아빠만 있었더라도...' 자식들이 아빠를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할 때까지 아빠는 철저히 아파했습니다. 아빠의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아빠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과음과 스트레스와 피로와 사회에 시달리는 아빠는 병자가 다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이제 그만 쉴래. 난 지쳤어라는  사직서를 가슴 깊숙이 묵어버리고 자식들의 환한 웃음에 위안을 삼습니다. 늦은 밤 괴로워 잠 못들며 뒤척이며 아빠의 모습을 본 후로는 아! 아빠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 밥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하시며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끄떡없는...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넋두리인줄만 알았습니다. 한밤중에 자다깨어 방 한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그 모습을 본 후론... 아~ 어머니...어머니...당신은 그러면 안 되는것 이었습니다." 

 요즘 막내아들이 고등학생이라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아이 엄마가 뒷바라지 하면서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고등학교 시절을 저렇게 보내었는데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떠올리면 죄송하기도 하고 회개하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저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편입니다. 추운 겨울날 바닷가에 가면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자식 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지금처럼 잠수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그 추운 겨울 바다에 들어가 수고했던 어머니는 괜찮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세상 속에서 가정과 자식을 위해 마치 개처럼 취급을 받고, 모든 자존심이 무너질 때도 참아내었던 아버지들의 그 헌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제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어미의 마음, 아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나가는 글 

성도 여러분! 어버이 주일을 보내면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어 주신 하늘의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여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모욕과 고통을 참아 주신 주님을 사랑을 기억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 부모님의 그 모든 사랑과 희생과 수고를 알고 갚아드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강복하십니다. 높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연대의식과 동일시의 사랑의 믿음, 어렵지만 고난을 통과하는  믿음,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붙잡고 신뢰하는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가운데서 새로운 기적과 역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보내어 주시고, 이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여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을 은혜 가운데 지켜주셔서 노년에 강건하도록 도와주시고, 무엇보다 신앙을 가져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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